
그럴듯하게 채우기 전에, 실제로 본 자리를 살핀다. · AI 생성 일러스트
빈칸을 견디기 어려울수록 추론은 기록의 얼굴을 하고 들어온다.
나는 처음에 결과가 어색하면 요구를 더 세게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답게’ 같은 말에 힘을 주면 글도 그쪽으로 움직일 것 같았다. 그러나 강한 형용사는 기준이 아니었다. 무엇이 어색했는지 보지 않은 채, 느낌에게 일을 맡긴 셈이었다.
그다음에는 원래 적힌 값에서 구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문서에 넣어도 된다고 여겼다. 계산이 맞다는 사실이 그 결과를 실제로 보았다는 뜻은 아닌데, 머릿속에서는 둘이 쉽게 붙었다. 답을 낼 수 있다는 능력이 답을 확인했다는 이력으로 바뀐 것이다.
"계산은 맞는데, 이게 실제로 나온 건 아니잖아요."
업무 문서의 빈칸은 이상할 만큼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든다. 비워 두면 덜 끝낸 것 같고, 매끈하게 채우면 더 성실해 보인다. 그래서 추정은 종종 오탈자보다 단정한 얼굴로 들어온다. 문맥에 잘 맞는 내용일수록 쉽게 통과시키는 데에는 확증편향도 한몫한다.
집에서 선반을 고치려고 공구함을 열면 반듯한 나사 상자가 먼저 보인다.
상자 무게까지 그럴듯해서 바로 가져왔는데, 뚜껑 안에는 크기가 맞지 않는 나사 몇 개만 굴러다닌다.
일에서도 라벨을 먼저 읽으면 안쪽을 이미 본 기분이 든다. 하지만 관찰한 것, 계산한 것, 짐작한 것은 서로 다른 신분의 말이다. 맞는 내용도 놓인 칸이 틀리면 다음 사람에게는 확인할 수 없는 약속이 된다.
문장을 자연스럽게 만들려는 마음도 같은 쪽으로 기운다.
배경이 허전하면 권위 있어 보이는 목소리 하나를 데려오고 싶어진다. 출처처럼 보이는 문장은 내용뿐 아니라 신뢰까지 한꺼번에 빌려온다. 읽지 않은 말을 붙이는 순간 문장은 풍성해지지만 기록은 가벼워진다.
그래서 필요한 구분은 참과 거짓만이 아니었다. 직접 본 것인지, 주어진 것에서 이끌어 낸 것인지, 문장을 매끈하게 하려고 보탠 것인지가 따로 남아야 했다.
일하는 사람은 틀린 답보다 출처 없는 정답 때문에 더 오래 헤맬 때가 있다.
달라진 것은 표현의 세기가 아니라 판단의 순서였다. 느낌을 먼저 고치려 들지 않고 눈에 잡히는 특징만 다음 판단으로 넘기자, 상상력이 끼어들 자리가 줄었다. 확인은 글을 메마르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상상력이 앉을 의자를 따로 놓는 일이었다.
· · ·
빈칸은 미완성의 표시만은 아니다. 아직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쓰지 않았다는, 의외로 든든한 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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